2008년 01월 24일
망각의 우물
사람의 기억이란게 참 의외로 동물적이어서 기억의 목차라는 것이 어떤 사건들의 목록으로 정렬 되어 있는것이 아닌, 소리, 냄새 풍경 등 원초적인 감각으로 인덱싱이 되어 저장된다. 간단한 예로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에 긴 더위에 지친 목덜미에 기습적으로 찬 바람이 엄습할 때, 또는 느리게 떨어지고 있는 플라타너스 잎의 황량한 바스락 거림이 문득 두눈으로 들어올 때, 밑바닥에 가라앉아 까맣게 잊고 있었던, 몇 년전, 선물을 사들고 환하게 밝혀진 종로의 저녁 거리에서 그(또는 그녀)를 기다리던 기억이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르는 것. 또는 십수년만에 먹어본 장조림햄의 짭짤한 맛 때문에, 숫가락질도 잘 못했을 어릴 적 엄마가 숫가락위에 김과 함게 얹어서 떠먹여 주던 장면이 그 옛날집의 장판 무늬까지 생생히 바로 어제처럼 펼쳐진다거나, 길을 걷다가 어디서부터 날아온지 알수 없는 점멸하는 향기의 한줄기 바람으로 부터 옛 연인의 따스한 체취가 떠오른다거나 하는 것이다.
이런 기억들은 참으로 기습적이어서 보통은 대처할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하게 되고 뒤늦게 마음을 추스리느라 한동안 그야말로 싱숭생숭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, 오늘은 웹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듣게된 음악 '하울의 움직이는 성'의 왈츠 곡 '인생의 회전목마'에 당하고 말았다.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익숙한 음악이 나오길래 이게 무슨노래더라 하고 고민을 시작할 무렵 어느게 먼저 라고 할 수 없을정도로 동시에 '하울의 움직이는 성' 과, 어두컴컴한 극장 내부와, 그리고 끈적한 땀을 아랑곳하지 않고 꼭 잡고 있던 손이 앞다투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올라 버렸다. 되짚어 보니 하울의 성 개봉이 2004년이니 벌써 4년전이다. 잊었다고 생각했지만, 아니 잊지 못했다고 말할순 없지만, 잊어 버렸었지만. 그 기억들은 단지 가라앉아서 하늘로 손잡이를 드러내 놓은 채 누군가 잡아 올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괴씸한 하울이란 놈이 바로 그 손잡이에 딱 맞는 열쇠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.
하지만, 기억이 수면위로 떠올라 따가운 햇살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지 않았던 것은, 역시 잊었다고 주장할 수 있고 또 잠시후 아무렇지 않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근거 또는 힘이 된다.
어찌 보면 잊는다는 것은, 기억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.
(유튭이 참 좋은게 저작권 걱정을 안하고 노래를 막 걸 수가 있다는 것이다. 위의 영상은 문제의 그 하울 음악.)
# by | 2008/01/24 16:39 | Category 0 | 트랙백 | 덧글(0)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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